지난 주말, 영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을 것만 같은 '할 일 목록'을 떠올리자 신경질적인 두통과 허기가 밀려왔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나저제나 되는대로 살아버릴 팔자인가보다 하며 할 일들을 대책없이 제쳐두고, 읽을거리를 찾았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게 이상의 수필 <권태>다.

떠올려보니 이상의 작품 무엇 하나 제대로 읽은 게 없다. 그 유명한 <날개>도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잡깐 접했을 뿐이다. 수업시간에 하도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시인', '난해한' 따위 말로 이상을 소개해 쫄아버렸던 것이다.

쫄보의 마음을 버리고 이젠 슬슬 - 이상을 읽어볼 때가 되지 않았나 - 생각한다.






이상은 필명이다. 본명은 이해경. 필명을 참 잘 지었다. 어쩜, 이상이라니 -

<권태>는 이상이 권태에 절어 의식의 흐름대로 써내려간 글이다. 막 지었는데도 잘 지어졌으니 이상이 천재가 맞긴 맞나보다. 

이 <권태>라는 이름이 붙은 수필에는 그야말로 권태가 뚝뚝 흐른다. 아니, '뚝뚝 흐른다'는 말은 권태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역동적이다. 그러니 '권태에 미지근하게 잠겨 있다' 정도로 해두자.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도무지 할 일을 찾을 수 없었던 이상. 그는 권태로이 권태의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어느 것 하나 권태롭지 않은 게 없다.

놀고 있는 동네 아이들도 그저 "나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어찌하였으면 좋을까 당황해 하고 있는 권태들"로 보인다.

논에서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도 '열심'이나 '희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다. 이상은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라고 말한다. 웅덩이의 송사리 떼 조차 권태롭게 보인다.

별 조차 싱겁다. 이상의 눈엔 모든 게 다 권태로 보인다. 그 자신이 권태여서 그렇다.

권태에 잠긴 이상은 권태의 쓸모를 발견한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도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살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 망살하다 : 망쇄하다의 비표준어. 망쇄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몹시 바쁘다. )



권태로울 때 나는 내 권태 속에서 이런 쓸모를 길어 올릴 수 있었던가? 아니, 나는 이 흉포한 4차 산업혁명 홀릭 사회에서 제대로 권태 할 능력이 남아있긴 한 걸까? 권태에서조차 '쓸모'를 찾는걸 보니 요원하다. 권태조차 희귀한 것이 된 세상에 살고 있다.

권태 능력을 잃지 않았다고 가정하자면, 내가 권태로울 때 나는 무엇을 하느냐. 그야 자의식 과잉이다. 이상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권태로 말미암음 이다. 


이상 때부터 자의식 과잉은 현대인의 질환이었구나. 권태와 그로 인한 내면의 성찰, 얕은 성찰에서 빠지기 쉬운 자의식 과잉. 이게 매우 보편적이라는 걸 이상의 글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 밑줄 친 문장들 -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이 다시 없이 밉다. 

> 아 내 마음의 질병을 이상이 정확히 써두었다.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 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이리라. 
> 라임 ㅋㅋ




이상 관련 글 : 피를 팔아 한 연구 <친일문학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