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꽤나 열성적으로 읽었다. 당시 기분이 끝내주는 상태를 '아드레날린 분비' 정도로 서술한다는 걸 신박해하던 나를 기억한다. 

<개미>를 읽고 고수부지에 쪼그려 앉아 눈으로 개미를 좇던 아이가 어느덧 머리 굵은, 그러나 여전히 혼란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른이 됐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읽었다. 이번엔 그의 신작 <죽음>이다. 

죽음. 모든 종교와 문학의 원천. 끊임없는 창작의 소재. 
과학이 풀지 못한 마지막 영역. 그리고 과학이 풀어낼 마지막 영역. 

나는 왜 태어났지?    ( <죽음>은 이 질문으로 끝난다. _____ 스포일러 쏘리_______ ) 
근데 왜 죽어야되지?
죽은 다음엔 뭐가 있지? 
전생-현생-내생은 존재하나?
그러니까, 대관절 이 모든 게 대체 무슨 의민데? 

이런 질문들은 대개 머리 아프고, 자칫 투머치 현학으로 빠지기 십상이며 최악의 경우 신비주의라는 당황스런 종착역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이와의 대화 테이블에는 가능한 올리지 않는게 좋다. 다른 누군가가 이 주제를 꺼내들면 어느 정도 맞장구를 치다가 정돈된 미소를 지으면서 '아 그나저나 요즘 예매율 1위라는 그 영화 보셨어요?' 따위의 잡담거리를 던져 적당히 마무리하는게 좋다. 

즉 이런 질문들은 혼자 있을 때 조용히 꺼내들어 물이 찰랑 거리는 상상의 세숫대야를 앞에 하나 놓고 그 안에 린스 풀듯 풀어 휘휘 저어가며 들여다보기 좋은 것들이다. 

당연히 답을 알 수는 없다. 어떤 순간 실마리를 찾았다 싶은 순간이 있을 수야 있겠지만 그건 순간의 (페이크) 감정일 뿐이다. 적어도 내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결국 결론은 자작해서 만들어낼 수밖에. 

각설하고, <죽음>을 읽으며 생각한 건 크게 2가지다. 

첫 번째. 중학생이던 내가 거진 꼰대가 다 됐을 정도로 시간이 지났는데, 작가는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나. (즉 그의 작품은 얼마나 성숙했나). 이 지점에서는 그닥 집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그는 초창기부터 너무 완성형이었는 지도 몰라. 

물론 예나 지금이나 베르베르는 너무도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혹자는 그가 '유독 한국에서만 유명세를 떨치지 유럽에선 별 볼일 없다'는 둥 이야기하지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알 바 아니다. 단 번에 읽어내려갈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건 분명 재능이다. 

두 번째. 소설을 읽는 내내 '주인공이 베르나르를 빼닮았군'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일정 부분 저자의 페르소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죽음>의 주인공 가브리엘은 눈에 띄게 그렇다. 가브리엘은 베르나르와 마찬가지로 기자였다가 베스트셀러 소설가다. 그리고 베르나르와 마찬가지로 상상력 문학을 한다. 

소설에서 가브리엘이 아카데미즘에 경도된 문학 작가들의 멸시를 받는 내용이 나온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것 같다. 2권에서는 일명 '상상력 문학 군대'와 '공식 문학 군대 (아카데미즘)'가 영혼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까지 나오는데 엄청 재밌다. 전투가 

우리는 다 같은 존재들일세, 이야기꾼들이지. 나쁜 문학과 좋은 문학이란 구분은 애당초 없네. 그저 상상력의 문학에는 문체와 심리 묘사가, 문체를 중시하는 문학에는 상상력과 환상이 필요한 것뿐일세. 내용과 ㅎ여식은 상반되는 게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이니까. 자네들의 뿌리가 뭐였는지 생각해 보게. ( ~~ 중략 ~~ ) 다양성이 곧 우리의 힘이야. 특정 문학의 우월성을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일세. 

이런 중재로 마무리되는 게 김빠지지만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즉 베르나르는 자신의 문학을 지적하는 평론가 혹은 다른 동료 작가들에게 '적당히 하고 우리 화해하자고' 라는 메세지를 보내는 것 같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또 소설에서 인류가 과학을 밀어붙여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란 메시지를 준다.
사실 이는 현재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가브리엘이 <천 살 인간>이라는 새로운 소설 집필을 막 마치고 살해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 후반부에 밝혀지지만 가브리엘이 살해당한 것은 바로 이 소설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이 인간 수명 연장을 실제로 가능케 할 방법론에 상당히 근접해 상층 아스트랄계의 대천사가 나서서 가브리엘을 살해한 것이다.

이 대천사는 심지어 가브리엘의 독자로 나온다. 저자의 욕망이 소설에 반영된 ㅋㅋㅋㅋㅋ

천 살 까지 살고 싶다. 내일 눈뜨지 않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나는 또 금새 오래 살기를 욕망한다. 장수해서 <죽음> 속의 SF적 요소들이 지난 날 수많은 SF적 요소가 그랬듯 과학과 기술을 통해 현실 세계에 출력될 지 확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