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없을수록 필사적으로 책을 읽어야한다는 강박에 <깊이에의 강요>를 읽었다. 

라는 문장을 쓰고 보니, 과장이다. 

강박은 무슨. 그냥 초록색 표지가 예뻐서 읽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작가의 단편 묶음집이다. 


# 깊이 없음깊이에의 강요 사이 


제목만 보고 깊이에 대한 이야기인가 했다. 물론 저자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내용을 요약하는 제목 짓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평판에 대한 이야기다. 

(스포주의) 

한 젊은 미술 작가가 한 비평가로부터 '깊이는 없다'는 평을 받는다. 처음 그는 이 비평에 크게 영향 받지 않았다. 하지만 작가를 주위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떠든다. '젊고 유망한 작가야. 하지만 깊이는 없어' 따위의 말이 계속 작가의 귀에 꽂힌다. 

이내 작가는 깊이에 집착한다. 자신을 의심한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작들에서 깊이를 찾아보려고도 하고 사람들에게 깊이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기도 한다. 물론 어디에서도 답을 찾지 못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작품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깊이가 없다고 느낀다. 

깊이. 꽤나 '있어보이는 말'이다. A는 다 좋은데 깊이가 없어. 따위 말을 하기란 얼마나 손쉽게 있어보이는 화법인가. 깊이라는 말. 그 추상도 만큼이나 주관적이고 모호한 말이다. 

이 깊이는 없다는 한 줄 평가는 결국 젊은 작가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자살로 생을 마친다. 미디어는 이 '흥미로운 가십'을 놓치지 않는다. 

다시 그 예의 비평가가 죽은 미술 작가에 대한 글을 쓴다. 그의 작품에서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깊이에의 강요"가 있다는 평가한다.

같은 작가의 같은 시기 작품에 대한 상반된 평가. 깊이 없음과 강요스러울 정도로 깊이가 있다는 이 정반대의 평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비평가의 평가가 얼마나 얄팍했는가(깊이 없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 하지만 죽어버린 작가에겐 정말 깊이가 없었다


소설은 너의 얄팍한 평가로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으니 함부로 누군가에 대해 단언적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진 않다. 

젊은 작가는 비평가의 얄팍한 비평 한 줄에 무너져 삶을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정말 '깊이는 없었음'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를 '깊이 없이' 만든 자는 그 자신인 것이다. 그는 정말 깊이가 없었다. 

누구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실로 매우 재밌기 때문에 평가는 곧 평판이 돼 귓전을 때린다. 요는 나에 대한 평가가 나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손쉽게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때때로 매우 세련되게 - 그러니까 '있어 보이게' - 하기 때문에 정말로 진실처럼 들리지만, 실로 별 것 아니기 때문이다. 확신할 수 있는건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로 천착해야 할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 평판에 죽어버렸으니, 이 작가는 정말 깊이가 없었던 것이다 - 라는 얄팍한 평가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