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든 일상을 할퀴었고, 대학 캠퍼스도 예외는 아니다. 졸업식은 온라인으로 대체됐고 모 대학은 졸업장을 드라이브 스루로 픽업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졸업 시즌 캠퍼스 풍경이 완전 삭막해진 것은 아니다. A대학 캠퍼스 곳곳에는 졸업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워낙 텍스트 덕후인지라 당연히 현수막에 쓰인 텍스트를 유심히 읽어내려갔다.

이 글은 A대학 캠퍼스에 펄럭이는 졸업 축하 현수막들을 보며 든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큐티섹시#야망의비즈니스맨 사이의 간극

적어도 몇 십 개의 현수막을 지켜본 결과, 한 가지 현상을 발견했다. 졸업생의 성별에 따라 현수막의 레파토리 양상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졸업생이 여자일 때, 현수막에는 #여신, #미모, #큐티섹시, #이쁘니 등 키워드가 수시로 등장한다. 일부 현수막만 그런 게 아니라 '양상이 이렇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OO여신', '최강미모' 따위 멘트가 클리셰로 쓰인다.  전반적으로 졸업생이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여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반면, 졸업생이 남자인 현수막에는 미모를 묘사하는 키워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기실 '전혀' 등장하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신 #사업가, #업계떠오르는샛별, #체어맨, #대표님, #야망의비즈니스맨 등 키워드가 남자 졸업생들을 떠받든다. 




2020년, 아직도 '여신'을 찾고 앉았다 



여신. 여자 졸업생을 위한 현수막에 특히 많이 등장하는 단어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는 '여신'이라는 키워드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아마 요조가 '홍대 여신'으로 주목받으면서인 것 같다. 

이 '여신'이라는 표현에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재원'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여자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로 여겨지는 바로 그 칭찬. '예쁜데 실력도 좋아!'. 그런데 그 말을 맥락을 촘촘히 보면 그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는 표현인지 알 수 있다. 여자는 실력이 출중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일단 '예뻐야'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미모와 실력을 겸비하라'는 사회의 잣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코르셋을 조여왔던가.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동등한 직업인, 사회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대상화 됐는가. 

'홍대 여신'이라는 별명의 주인공 요조는 '외모 얘기는 그만 하고 싶다'고 말하며 '홍대 여신'이 불쾌한 명칭이라고 이야기한다.  ( 참고로, 요조는 요조숙녀에서 따온 것이 아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주인공 이름인 요조에서 따온 것이다.) 여신이라는, 이 칭찬의 외피를 입은 수식어가 실제로는 '외모 평가', '차별적 대상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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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졸업 축하 현수막으로 돌아가보자. 

졸업 축하 현수막은 주인공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돈과 정성을 모아 만들어준 것이다. 청춘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오직 선한 의도로 만들어준 것. 즉, 주인공에게 성차별적 프레임을 악의적으로 씌울 동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까지 성차별적 프레임이 견고하게 작동한다. 이 사회의 성차별적 관행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2020년, 캠퍼스에서 이런 풍경을 마주할 줄 몰랐다. '뭘 또 불편하다고 난리야' 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묻고 싶다. 당신은 이게 왜 불편하지 않은가. 혹시 당신의 무지에서, 무지할 수 있는 권력에서 비롯된 '불편하지 않음'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