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었다. 

소설은 단순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또 기대(!)와 달리 '나쁜 사람은 결국 벌을 받는다'라는 지나치게 고전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독자로서 김빠진다랄까. 오스카 와일드는 그 자신이 시인했던 것처럼 "모든 재능을 삶 자체에 썼"지 문학에 쓰지 않은 게 분명해.. 

그래도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인만큼 소설의 스토리는 꽤 매력적이다. 여기 우리의 주인공인 도리언 그레이가 있다. 아름답고 순수하고 큰 재산을 상속받은 젊은 청년 도리언 그레이. 그는 자신을 그린 초상화를 바라보며 '나 대신 초상화가 늙고 영원히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현실이 된다. 

도리언은 젊은이다운 어리석음으로 쾌락을 핥는다. 죄악을 일삼는다. 그의 영혼은 타락한다. 타락한 영혼은 육신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넘긴 도리언은 예외였고 초상화 속 도리안만 비열하고 타락한 모습으로 변해갈 뿐 실제 도리언은 완벽한 젊음을 유지한다. 

결국 도리언의 영혼은 완전히 타락해버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양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초상화를 파괴한다. 이 순간 초상화의 모습과 실제 모습이 바뀌어 도리언은 본래 추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나쁜 짓을 하면 결국 죄값을 받음!--이라는 김빠지는 교훈으로 끝나는 이야기. 소설 중반부터 결말이 예상되는, 소설적 장치가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다.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이기라기에 something more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조금 김빠진다랄까. 

그래도 문체는 좋다. 꽤 많은 독자가 오스카 와일드의 치장 심한 문체가 거슬린다는 감상평을 남겼는데, 이런 문체를 통해 오스카 와일드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사실 내가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바로 '헨리 경'에 대한 이야기. 헨리 경, 그는 이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존재다. 

도리언 옆에서 그가 타락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매력적인 경구를 수백 가지쯤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는 도리언에게 '자신의 쾌락을 마음껏 따르라, 쾌락을 탐닉하라'라고 넌지시 부추긴다. 

하지만 그 자신이 쾌락을 좇는 삶을 살았는지는 소설에서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쾌락을 도리언을 통해 푼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건 헨리 경이 도리언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도리언의 타락을 옆에서 부추기며 그 모습을 관조하고 음미한다. 심지어 그는 도리언에게 이렇게 말한다. 

"헌데 말이야...'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음, 다음이 어떻게 되지?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이던가?"

교활한 사람. 헨리 경은 정확히 도리언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도리언이 영혼을 팔았다는 비밀까지 말이다. 그야말로 위험한 인물이자 소설에서 '악'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초상화를 그린 바질은 '선'을 대변한다.) 

하지만 동시에 헨리 경은 여러 면에서 저자 오스카 와일드를 떠올린다.


출처: 위키백과


오스카 와일드는 대표적인 유미주의 작가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위키백과사전에 따르면 유미주의는 탐미주의와 동의어로 19세기 중반 합리주의나 기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미학적 기준은 도덕성, 실용성, 쾌락 등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성을 지녀야 한다고 태도 및 세계관을 뜻한다. 헨리 경이 도리언을 부추길 때 하는 수많은 경구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마음껏 아름다움을 좇고 이 과정에서 거슬리는 도덕적 감수성 따위 숭고함은 넣어둬' 라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카 와일드가 소설 속 헨리 경의 입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다. 이를테면 헨리 경은 오스카 와일드의 페르소나인 것이다. 실제로 헨리 경이 소설 속에서 유려하게 내뱉는 대사들은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명언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글에서 읽는다고 해도 전혀 이질감 없을 정도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헨리 경은 소설 속에서 '악'을 대변하는 인물. 오스카 와일드를 닮은 헨리 경이 소설 속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결국 악역, 교활한 늙은이일 뿐이다. 

만약 오스카 와일드가 헨리 경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했다면 나르시시즘이 강했던 그의 성향상 헨리 경에게 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혼란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겉으로 유미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유미주의적 삶(?)이 결국 타락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걸까? 

오스카가 '헨리 경'이라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게 결국 무엇이었을까? 

나는 도리언 그레이의 삶과 생각보다 (오스카 와일드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헨리 경의 삶과 생각이 더 궁금하다. 아쉬운대로 오스카 와일드 평전이라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