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 <진정성이라는 거짓말>_written by 앤드류 포터_를 읽었다.

이 책의 첫 장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타이밍 참 얄궂고 적절하다.
퇴사한김에 '진정한 나'를 좀 들여다볼까? 라고 마음먹은 찰나 하필 펴든 책에서 이 문장과 조우한 것이다.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읽었다.

책을 좀 들여다보자.

환멸을 느낀 젊은이가 근대적 삶의 철창 너머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스토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수에 갔던 시대에도 벌써 진부했다.

환멸을 느껴 근대적 삶의 철창 너멀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젊은이! 정확히 현재의 내 모습이다. 

환멸은 언제나 내 가슴과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 용기를 쥐어짜 이 환멸을 벗어던지려는데 물질 문명의 옆으로 비켜서려는 전략은 클리셰일뿐더러 어딘가 착오가 있다 말하는 저자를 만났다. 

그들이 욕망한 삶의 ‘본질적인’ 핵심은 달리 말하면 ‘진정성’이다. 진정성 찾기는 우리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 목표로 부상했다. (중략)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싸구려 대량생산 소비제품으로는 진정성 있는 개인 정체성을 구축할 수 없으며 지구를 아끼고 최소한의 발자취만 남기는 것이 진정한 삶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진정성 찾기가 '우리 시대'에 부상한 유행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진정성 찾기는 최소 붓다 때부터 화두였다. 붓다가 철부지 인도 왕자에서 우리가 아는 그 '붓다'가 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진정성 찾기에 나섰기 때문 아니었던가. 

또 철학사 어느 장을 펴봐도 모든 세기의 철학자들이 계보를 이어가며 탐구한 주제다. 종교, 문학 등 어느 분야 책을 무작위로 펴들어도 모두 제각각의 각도로 '진정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 목표로 부상"했거나 21세기의 새로이 등장하거나 갑자기 주목받은 목표가 아니란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보자. 책에서 앤드류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책의 대주제다. 적어도 삶의 의미 찾기에 필요한 대대적인 방편으로서의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성은 세상을 논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우리가 타인/세계/사물과 맺는 관계에 대해 판단하고 주장하고 선호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진정성 이상을 추구하는 방식이 오늘날 오히려 ‘비진정성’을 초래하는 강력한 원인이 됐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진정성을 찾으려는 현대인의 고투는 문제의 해결책이기는커면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글쎄, 흠. 이 주장에 잘 동의되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 비즈니스, 마케팅, 상업 전략에 '진정성'을 덧씌운 사례를 말하는 것이라면, 여기에 진정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게 맞다. 이런 진정성 추구는 그저 '아 나 쫌 멋진데'라는 감정을 느끼기 위한 자위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때론 위선적이고, 이 위선의 연장선상에 어떤 우월감이 내포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드는 생각. '아니 이건 누구나 아는 거잖아?!' 엄청 보수적으로 따져도 우리는 모두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돈벌이 수단으로 대대적으로 홍보되는 진정성들은 모두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진정성을 가장하지만 실은 진정성과 거리가 먼 것들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진정성 자체가 없다고 결론 내리거나 진정성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또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은, (혹은 찾는 것은) 리모콘으로 TV를 켜는 것처럼 그냥 단숨에 되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고 순도 100%로 이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찌질하고 같잖고 위선적이고 그래서 추악한 순간들을 지나면서 조금씩 진정성에 가닿을 수 있다. 


앤드류는 이런 말도 한다.

우리에겐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진정하고 의미 있고 생태친화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시장경제 같은 근대의 많은 측면들이 해롭지 않고 오히려 풍성하고 활기찬 가치의 원천으로서 포기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접근법 말이다.

앤드류가 '챕터 2. 순진한 원시주의로의 회귀'에서 하는 말인데, 평이한 주장이므로 동의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시장 경제가 가져다주는 모든 편리함과 안락함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완전히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 앤드류가 이 주장을 펴며 "새로운 접근법"이라고 표현한게 조금 우습다. 내가 아는 모든 생태주의자들은 "근대의 많은 측면들이 해롭지 않고 오히려 풍성하고 활기찬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술 등 근대의 업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앤드류가 "새로운 접근법"이라고 말하는 접근법이 이런 것이라면, 글쎄 이걸 새롭다고 할 일인가?

생태주의 얘기는 이 쯤하고, 앤드류가 책의 말미에 정리해놓은 이 책의 요지를 보자.


진정성 허구를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근대와 화해하고 지난 250년이 비극적 실수가 아니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지만, 적어도 총체적으로 봤을 때 근대를 끝장내고 후진해 향수 젖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은 잘못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다. 근대와의 화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일을 수반한다. 그것은 그 두 가지가 단순한 필요악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 구조와 도덕 기반을 갖춘 정치/경제의 조직체계로서 이전 체계보다 일정한 장점을 지님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시장의 등을 돌리는 일은 옳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야기인데, 흠...
일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인류 이데올로기의 끝판왕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유발 하라리를 잠깐 등판시켜보자. 유발 하라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역사의 종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두 이 이데올로기로는 기술 혁명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를 극적으로 오갈 미래를 핸들링하기 어렵다. 즉 우리 시대가 할 일은 이미 30년 전에 나온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논의를 답습하는게 아니라, '그 다음'을 발명하기 위해 토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시대를 위해 고안될 이데올로기에서도 '진정성'은 여전히 중요한 화두로 존재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고 본다.

덧)

-<진정성이란 무엇인가>는 논의를 풀어가는 방식이 빼어나다. 또 번역이 정말 잘됐다. 번역을 누가 했는지 찾아볼 정도로 잘 된 번역.

-책 말미에 니체가 나오는데, 이해가 잘 안돼서 일단 스킵했다. 나중에 다시 읽어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