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내 세계도 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 커졌다. 딱 우리 집 만하던 세상은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학교가 있는 거리만큼 확장했고, 머리가 굵어져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마다 이 과정이 반복했다. 어릴 때 어렴풋이 내 인생에 잠시라도 얼굴을 비췄던 사람들에게 각각의 우주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게 그리도 신기했다.
내 옆을 스쳐간 이름 모를 사람들, 나와 옅든 진하든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미치게 궁금했다. 어릴 때는 그 모든 이야기를 글로 풀어 책으로 쓰는 상상을 하며 놀았다. 화자가 계속 바뀌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어지면서도 독립적인 길고 긴 이야기다.
이 상상을 현실로 바꾸기도 전, 내 우주는 다시 내 방 한 칸으로 쪼그라들었다. 무엇보다도 낙오되지 말아야 할 어른이 된 까닭이다. 여전히 다른 이들의 우주엔 오늘 어떤 일이 생겼을지 궁금하다. 나와는 그저 서로 예의바른 관계로 만나 선선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뜨겁고 악다구니 쓰고 절절하고 눅눅한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비단 나와 선선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 뿐이랴. 오늘 길거리에서 본, 이름 모를 이의 이야기도 빠짐없이 궁금하다. 이름 모를 사람에 대한 이유 없는 애정인 동시에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다. 하지만 나는 조심성 많은 사람이고, 고로 그들의 이야기를 현실에서 알아볼 생각은 않는다. 현실에서의 관계는 대개 선선한게, 지루하지만 안전하니까.
결국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소설에서 푼다. 일명, 문학이라는 놀이.
성석제의 <투명인간>을 읽었다. 이야기의 화자가 계속 바뀐다. 화자가 바뀔 때마다 소제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뭘 믿고 이토록 불친절한 소설을 쓴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도한 친절을 장착한 온갖 콘텐츠에 찌들어서 든 생각같다.
처음엔 '라쇼몽' 같은 이야기인가 했다. 만수가 태어난 일화를 두고 만수의 어머니 입을 통해 한 번, 바로 뒤이어 할머니 입을 통해 한 번 들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이 소설이 라쇼몽류라기 보다는 '만수'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기실 저자는 대놓고 처음부터 '김만수'라는 이름을 버젓이 던지지 않았는가.
소설은 김만수의 일생. 그러니까 그가 태어나서,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날까지 다룬다. 화자로 등판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단 만수만은 절대 화자로 등판하지 않는다.
만수는 누군가에겐 경멸의 대상이, 누군가에겐 부럼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가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처신하는 인물이 아님에도 그렇다. 만수는 저자가 짜증스러우리만치 대놓고 '선한' 인물로 설정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 선함과 쌍을 이루듯 '바보스러움'도 같이 설정했다. 다소 식상하지만, 독자로서 주인공에게 정붙이기 좋은 설정인 것도 사실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저자에게 '왜 만수는 화자인 파트는 단 한 구절도 없는 것이오?'라고 따져묻고 싶은 심정이다. 만수는 자신의 삶을 무한히 긍정할까? 고된 나날이었지만 행복했다고 회상할까? 그에겐 어떤 한이나 악다구니가 없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소설을 다 읽고서도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투명인간'이 당최 왜 나온 것인지 한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투명인간은 지극히 SF적 소재이자, 장치다. 그런데 이 소설은 SF와 가장 거리가 먼 그런 류의 소설이다. 그렇다면 투명인간은 SF적 요소가 아닌, 다른 메타포라는 이야기다.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들의 메타포. 투명인간 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메타포.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을 만수를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소설 말미 '작가의 말에' 저자 성석제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이렇게 썼지만, 그도 자신의 소설이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리란 것을 알았을 것이고, 또 바랐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일단 나부터 위안을 받았다. 더구나, 이런 생각도 든다. 모든글 중에 소설이야말로 위안을 주는 글 아닌가?라는.
소설을 읽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을 굳이 꼽자면, 소설 전반에 은근히 녹아 있는 '가족주의'의 너저분함이다. 만수의 아내, 석태의 새엄마가 속 썪이는 석태를 온갖 고생을 하고 키워놨더니 석태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새엄마와 신장 조직이 똑 떨어지게 맞아서 신장을 이식해주는, 소설에서도 '기적같은 일'이라고 말하는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헌신하면 헌신짝되는 게 현실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같이 가족주의 서사가 팔리는 이유는 오늘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계속 그 희생을 감내하게끔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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