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의 단편 <구두>를 처음 읽은 건 KBS한국어능력시험 지문에서였다. 

워낙 짧은 단편이기에 지문에는 거의 소설 전체가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다른 문제들은 아무렇게나 대충 풀어버리고 OMR카드도 휘적휘적 아무렇게나 그려내고, <구두>의 지문만 몇 번이고 읽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바로 소설 전체를 구해 읽었다. 

소설은 공포스런 상황을 그리고 있다. 계용묵 작가나 소설의 화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냐면, 안전불감증을 앓고 내가 감정을 이입해봐도 확실히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공포스런 상황이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소설은 한 사내(화자)가 수선집에 구두를 맡겼다가 뒤축에 큰 징이 박힌 구두를 받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내는 구두 축과 시멘트 바닥이 내는 마찰음에 질색한다. 

"그 음향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그는 "이건 흡사 사람은 아닌 말발굽 소리다"라고 그 소리를 묘사한다. 

그리고 소설은 사건이 벌어지는 '어느 날'로 넘어간다. 
시간은 "해가 지고 어슴푸레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 

사내는 예의 구두를 신고 담을 끼고 걷다가 몇 걸음 앞서 걸어가고 있는 한 젊은 여자를 의식한다. 정확히 말해 자신을 향한 여자의 의식을 의식한다.

그는 여자가 자신이 내는 굽소리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위협의 대상이 된 것에 억울함을 드러낸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땅바닥을 박아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사내는 여자를 안심시킬 요양으로 걸음에 박차를 가한다. 

여기까지 읽고 소설 속 젊은 여성이 느꼈을 공포를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종종 느끼는 공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발굽 소리' 같은 구둣소리가 속도를 빨리하는 게 감지됐다면 이건 머리가 쭈뼛 설 일이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먼저 스마트폰을 꺼내고 112를 장전해 놨을 것 같다.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는데 이 정도 경계를 못하랴. 

몇 걸음 차를 둔 불편한 레이스는 여자가 뚫어진 옆 골목으로 길목을 틀면서 끝난다. 

사내는 서글퍼 한다.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그리고 푸념한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모욕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단편을 다 읽고 소설 속 사내가 안타까웠다.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시민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또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사회의 문제는 보지 못한단 말인가. 

고작 모욕을 느끼는 포인트가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그가 서글퍼 하는 것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불량배로 기억될까봐이지만, 여자는 그 순간 최악의 경우 죽음까지 상상하며 기지를 발휘해 옆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단 말인가. 

아마 계용묵 작가는 자신이 비슷한 일을 겪고 <구두>를 썼을 것 같다.  

이리저리 구글링하다가 <구두>의 작품해설을 읽게됐다. 그 작품해설에 나오는 이 단편의 주제는 '인간관계가 왜곡돼 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과 세심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세태 개탄'. 

글쎄. 작가가 의도한 게 위의 주제라면 이따위 빻은 감수성으로 펜을 잡으면 안됐던 게 아닐까. 

계용묵을 검색창에서 찾아보니 1904년 출생 1961년 사망이었다. 시대적 한계였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이래저래 씁쓸하고 한심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