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_ 박훈


일본이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일찌감치 개국(開國) 노선을 밟은 것은 조선, 청과 달리 국방력이 약해 외세의 침략을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기억하는 바로 나는 우리나라(조선, 대한제국)가 19세기 세계 흐름에 대응했던 태도(쇄국정책)와 일본의 태도와 그에 따른 결과가 상이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배웠다. 아마 아빠가 해준 말 같다. 사실 한 10년 동안 이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살았다. 대학 시절 East Asian History and Civilization 과목을 수강할 때 메이지 유신에 대해 배웠지만, 그때도 별 생각 없이 시험을 치르기 바빴다.

그런데 최근 이 설명이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어 '메이지 유신'에 대한 글을 찾았다.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짚어든 경위다. 그런데 이 책은 '메이지 유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독자가 '메이지 유신'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는 전제하에 이 사건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담은 책이었다. 그래서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의 '메이지 유신' 파트와 East Asian History and Civilization 교재를 다시 꺼내서 읽어야 했다.

아무튼, 메이지 유신에 대해 대강 설명하자면.

메이지 유신은 1868년 도쿠가와 막부에게 이양됐던 천황의 통치권이 다시 반환되고(왕정보고), 일본 천황이 일본제국을 수립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에도 막부는 붕괴하고 일본은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에 본격 착수한다.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16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11월 9일 대정봉환을 선언했다. 같은 해 11월 11일 천황(Mutsuhito, 당시 16세)은 요시노부의 통치권 반환을 허가했다. 그리고 1868년 2월 3일 일본제국이 수립됐다.

메이지 유신을 둘러싼 세부 사항(개혁인지, 개혁이라면 어떤 종류의 개혁인지, 도쿠가와 막부 내부의 변화에 의한 사건인지 혹은 보다 외부적 요인에 영향을 받은 사건인지 등)을 둘러싼 학계의 논쟁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모두 "the Meiji Restoration transformed Japan in less than forty years from a backward feudal nation into one of the world's great powers(<JAPAN, ASIA, AND THE WEST>) 라는데 동의한다.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정직한 책의 제목 그대로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19세기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를 추적한다. 저자 박훈은 도쿠가와 막부가 전국시대 이후 200여 년 가까이 평화 시대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외압(1853년 미국 메슈 페리 제독 사건, 1854년 미일화친조약, 1858년 안세이 5개국 조약 등)에 위기의식을 느꼈고 이것이 곧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이는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스스로 '구체제(앙시앵 레짐)'가 된 도쿠가와 막부의 혁신적인 태도 때문에 가능했다. 또 그 세력이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환해 스스로 해체하는 결단력을 보이기도 했다. 건국 이후 200여년 동안 평화 시기를 누리며 안일함에 취해있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태도와 확연히 다른 대목이다.

이같이 대략적으로나마 (책은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 시대까지 정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내 이해력이 모자라 대략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니 오해 않길 바란다)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배경에 대해 알게 됐다.


그런데!!!!! 내가 이 책에서 정말 감명 깊었던 것은 근세 동아시아 연구에 임하는 박훈의 신박한 시각이다. 


그는
근대를 '근세' 동아시아가 도달해야 할 역사 단계(목표)로 미리 상정해 놓고, 마치 출구를 앞에 두고 미로를 헤매는 대상을 다루듯 하는 연구 태도는 타당한가? 17세기와 18세기, 심지어는 19세기 동아시아 사회가 근대로 수렴되어야 할 필요성은 과연 존재했을까? 유럽 근대의 도래 이전의 역사를, '근세에서 근대로', 또는 '근대로의 도정' 등으로 설정하는 것은 역사 연구자들의 프레임일 뿐, 과연 역사적 실태를 반영한 것일까? 유럽 근대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전개 되었을지는 추측하기 어렵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다. 이어서

'근세' 동아시아와 '근세' 유럽은 (또 여타 사회는) 나름대로 자기 체제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말경 유럽에서 근대화라는 사상 유례없는 역사의 비약이 발생했다. 그것은 폭력, 재력, 매력이라는 면에서 곧 다른 문명들을 압도해 나갔다. 그러나 근대가 이제는 보편적인 길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근세'의 동아시아인들에게는 그것이 자명한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이후의 역사 전개를 보편적인 것, 기준적인 것, 우월한 것으로 상정해 놓고, 근대 이전의 역사에까지 소급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근세사' 연구는 유럽 근대의 역사적 경험에 입각하여 추출된 개념 모델을 가능한 한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수행할 필요가 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필자는 유럽 근대의 성취와 그 획기적 의의를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필자는 유럽 근대가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도 획기적인 변화를 인류사에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동아시아의 '근세'를 '초기 근대', '유교적 근대'라고 하여 유럽 근대와 병렬적으로 놓거나, 19세기 말, 20세기 촌락, 가족제도 등 '근세적' 요소의 강인한 잔존을 들어 '근세화'가 근대화보다 더 큰 변혁이었다고 지적하는 견해에 필자는 의문을 갖고 있다. 필자는 근대란 어디까지나 유럽에서 특정 시기에 우연적 요소와 유럽인의 치열한 주체적 노력까지 포함한 여러 요인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생한 특수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의 획기적인 의의를 인정하는 것과,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를 근대화라는 가치 기준 하에서 연구하는 연구 방법론에 찬성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요컨대 필자는 유럽 근대의 역사적 성취와 획기성을 높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근대주의자'라는 평가를 감수하겠지만, 전근대 역사에 대한 '근대주의적' 연구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지금은 메이지 유신에 대한 내용을 소화하기도 벅차므로, 갈무리 해놓았다가 다시 톺아볼 부분이다. (이 책을 다시 읽을 것을 다짐하며 일단 이 글은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