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_헤르만 헤세
(20대 초반에 써둔 서평을 옮겨둔다.)
소설에 대한 갈증이 극에 달해 달려든 책이다. 아주 예전에 외가쪽 친척 언니가 준 책인데 보존상태는 좋지만 워낙 오래된 책이라 종이색이 바랬다.
소설에 대한 갈증이 극에 달해 달려든 책이다. 아주 예전에 외가쪽 친척 언니가 준 책인데 보존상태는 좋지만 워낙 오래된 책이라 종이색이 바랬다.
<싯다르타>에 대한 재밌는 사실 하나.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헤세의 작품은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도 아닌 <싯다르타>다! 헤세는 1922년 <싯다르타>를 출판했다.
-시작-
텍스트르 읽고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읽었다'라고 말하는데 별 의미 없다. 작가의 메시지를 살피고 나름의 것으로 체화해야 비로소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싯다르타>를 읽었지만 읽지 않았다. 나는 헤세가 이 책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고싶어 조바심이 났고 편리함을 좇아 논문 몇 개를 찾아 읽었던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자아'다. 자아는 타인의 언어로 쓰인 이해와 깨달음을 익혀서 얻는 게 아니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그럴 수 없"으니까. 또 개인마다 고유한 자아가 있으니까. 싯다르타가 사문들의 세계를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문들은 세계의 모든 거짓과 부패의 연원인 물질 세계와 삶을 부정하는 것을 가르치며 이를 통해 '자아'의 극복과 사멸을 설파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몇년 간 금욕적 수행을 한후 그 수행이 "자아 존재의 고통으로부터 잠시 동안 빠져나온 것", 혹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동안 마비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찾고싶은 것은 '자아'를 확립함으로써 얻어지는 마음의 평화였지 평화롭지 않은 '자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타인의 지식과 진리와 결별하고 오롯이 자신의 '자아'를 찾아 떠난다. 그 어떤 타인의 지식, 지혜에서 앎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체험'으로서 자신을 찾는 여정이다.
헤세의 이런 메시지는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열정과 노력을 들여 '타인의 지식과 지혜'를 배우려고 노력했던가. 권위적인 타인의 지식을 통해 '앎'을 추구하고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자아를 찾는 데 오히려 억압기제로 작용한다.
모든 집단적인 것과 권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개인화의 길. 이 과정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개인성'의 실현을 억압하는, 즉 개인을 '자기'로부터 소외시키는 모든 사회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과정에 다름 아니다. -헤세연구 제31집. 자아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나의 자아는 보편화 될 수 없다. 자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특수한 것이다.
-헤세 관련 논문을 읽고 든 사사로운 의문 하나.
옮긴이 홍경호는 '이 책을 읽는 분에게'에서 "원래 '싯다르타'라는 명칭은 붓다가 속세에서 쓰던 속명인데, 이 작품에서는 싯다르타로 하여금 세존인 <고타마>를 찾도록 함으로써 실제상으로는 같은 인물을 작품에서는 두 명으로 나누어 놓은 셈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가 '부처', '석가모니'라고 알고 있는 사람과 소설의 주인공 '싯다르타'가 같은 사람이며, 또 이 싯타르타는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 '고타마'와 동일인물이라는 것. 그런데 논문 <두 싯다르타-헤세의 변형과 깨달음의 의미>_최윤영_에서는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 생존했던 부처 싯다르타와 소설 주인공 싯다르타는 동명이인이라는 것이다. 즉 같은 이름을 가진 별개의 인물들. 논문은 '헤세는 왜 독자들의 혼돈을 각오하고서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사용했을까?'라고 묻고 있다.
논문은 그 이유를 헤세가 만든 소설 속 '싯다르타'와 실제 '싯다르타'의 삶의 차이점을 발견하며 제시한다. 그 차이멎이란 부처의 일생은 '해탈'이라는 목표를 향해 일직선상으로 전개된 데 반해 소설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수행길에 올랐다가 다시 속세에 몸을 담갔다가하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 최윤영은 "진리를 향한 우회로를 그리면서 동시에 헤세 나름대로의 삶과 깨달음에 대한 견해가 들어 있다. 즉 다시 말해서 모범으로 삼은 부처의 실제 생애와 비교해볼 때 정신이나 종교적 수행만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고 인간 삶의 다양한 체험을 후기 단계에 배치해 이를 훨씬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 잠정적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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