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식민적 삶

10대 시절, 부모님은 우리 집이 '중산층'에 속한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말했다.  늘 '이 나라에서 중산층을 유지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이정도라도 사는걸 감사해야 한다' 따위의 말을 했다. 한창 거창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던 나에게 이 말은 소시민적 자위로밖에 다가오지 않았고 그들을 보신주의자로 여겼다.

그로부터 10년 후, 부모님은 우리가 더이상 '중산층'에 속한다는 것을 자신하지 못했다.  나는 소시민적 삶이라는 현실에 하루 한 대씩 얻어맞아야 했다. 최근 이 구타가 현실을 인정하라는 듯이 강도를 더해 이어졌다.

소시민적 삶을 사는 것은 자존감이 깎이는 경험이다. 굴욕을 감수해야 하는 일상의 전투에서 나는 이를 거부했고 불이익을 당했다. 시도때도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치밀어 오른다.

20년 후의 나는 '소시민적 삶'에 만족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그럭저럭 삶을 살아내고 있을까? 그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방법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

# 몸

몸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대개 '제약'으로 정리된다. 어릴적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를 읽고 지적/정신적 활동을 신체의 제약으로부터 분리시켜 지속, 발전한다는 개념에 매료됐었다. 이런 설정은 영화 '트렌센더스'에서도 등장하는데 나는 이 영화 역시 재밌게 봤다.

그런데 소설이나 영화나 결말은 기술 비관적이다. 어찌됐든 중요한 건 제약적 신체를 극복하는 일이 현재 내 일상과는 거리가 먼 설정이라는 사실이다. 인류가 가까운 미래에 신체 제약을 완벽하게 극복하리라고 생각한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온다>인지라 기술 낙관주의에 경도된 듯)

내가 신체를 '제약'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척추에 대한 경험이 일정 부분 기여했다. 나는 척추측만증을 지니고 있는데 위쪽 약 20도, 아래쪽 약 10도 도합 30여도 휘었다. 중학교 3년 내내 목 바로 아래부터 엉덩이 골까지 오는 플라스틱 보조기를 차야했다. 이 경험은 유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몸이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종종 어떤 기계에 나를 넣고 쭉 늘려서 척추를 곧게 펴는 상상을 한다. 척추가 곧게 펴지면 기분이 아주 상쾌할 것 같다.

몸을 '제약'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현재의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요즘 몸을 '가꿈의 대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자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적어도 몸을 제약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벗어던지려는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