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떠나고 싶은자를 찾습니다>_이신회

현실에서 '지구를 떠나고 싶은자를 찾습니다' 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마주했다면 일단 그 전단지를 곱게 접어 가방 속에 넣어왔을 테지. 지구를 떠나는 건 내 오랜 꿈이니까.


책 제목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지구를 떠나고 싶은자를 찾습니다'라고. 내 대답은 당연히 '저요. 제가 지구를 떠나고 싶은자 입니다' 였고, 책을 날름 읽었다.

'지구를 떠나고 싶은자를 찾는다'는 전단지를 만든 사람은 외계 어느 별에서 온 공주 '진호'다. 진호는 타임슬립 능력과 무엇이든 열 수 있는 만능열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병을 고친다든지 이런저런 상황에 맞는 참으로 편리한 능력들도 가지고 있다.

진호의 전단지를 보고 각자의 사연으로 인해 '지구를 떠나고 싶다'며 찾아온 사람들은 총 5명이다. 저자가 이 5명에게 쥐어준 설정들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첫번째 사람은 소설의 화자인 '지미'다. 나이는 26. 남자. 유명 헐리우드 배우의 아들로 죽은 아버지의 재산과 유전병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청년이다. 그가 아무리 소설 내내 자신의 위치를 '인턴'으로 설정하고 흙수저 코스프레를 했다지만 결국 진실은 어마어마한 금수저. 이쯤되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쉰내 나는 청춘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수준이다.

두 번째 사람은 수형으로 32살 남자다. 수형은 20살에 아버지가 두집 살림을 해왔고,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자살하자 복수심으로 12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엉뚱하게도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자신의 배다른 여동생에게 하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것도 여동생이 결혼을 앞둔 시기에 아버지의 불륜 사실을 알려 여동생에 죄책감에 파혼 위기에 몰리게 한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이다. 복수심이 든다면 잘못을 저지른 아버지에게 복수해야 마땅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에게 대들지는 못하고 만만한 여동생의 인생을 망쳐놓는 못난 사람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수형을 그저 사연이 있는 반듯한 청년 정도로만 묘사하고 지나간다.

세 번째 사람은 올리브로 32살 여자다. 직업은 변호사. 12년간 짝사랑한 남자가 청첩장을 보내오자 지구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공감되지 않는 설정이다. 저자는 올리브라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변호사'라는 엘리트 직업을 쥐여주었다. 아름답고 커리어 우먼인 '올리브'는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네 번째 사람은 여대 교수로 재직 중인 중년의 여성이다. 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딸이 자살 시도를 하게끔 만든 후에야 정신을 차리는 인물이다. 이쯤 되니 캐릭터가 왜 하나같이 엘리트에 금수저, 아니면 인습을 그대로 답습한 치들인지 화가 치밀 정도다.

다섯 번째 사람은 만화가를 꿈꾸는 모의고사 전국 1등 고딩 남학생이다. 외계인 진호가 남학생의 전국 1등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며 감탄하는 장면을 읽을 때는 정말 화가 치밀었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만화가의 길을 걷고 싶은 고딩의 사연을 극적으로 만들려면 적어도 '전국 1등' 성적표쯤은 나와줘야 한다는 듯한 전개였다. 식상했고 짜증 났다.

어쩌면 내가 속이 뒤틀려서 소설을 읽으며 짜증이 났을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맞을 테지. 하지만 나는 정말 일상의,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