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석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 편이다. 어쩌다 들어간 대학이 이대인 까닭에, '이대 나온 여자'가 돼 페미니즘 이야기 잘못 했다가 기센 여자로 조리돌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약간 작용했다. 하지만 주요인은 아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는 '척'하는 사람들과 마주앉아 있노라면 숨이 턱턱 막혀서다. 가부장제 하에서 누리는 안락함을 포기하길 꺼려하는 자칭, 타칭 '좋은 남자들'과 이들과 나란히 서서 나를 말간 얼굴로 쳐다보는 '명예 남성'들. 감정적으로 얄팍한 (공감 능력 부재는 감정적 얄팍함에서 온다) 이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공복에도 체기가 오르는 기분이다. 절망감과 심한 피로감이 정수리부터 발뒤꿈치까지 휘감는 기분. 나는 굳이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고, 내가 상처 입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 상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가량 남자친구나 친한 친구-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러 이 주제를 테이블에 올리지는 않지만 굳이 피하지 않는다. 이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부담을 기꺼이 진다.

이렇게 피로감을 무릅쓰고 대화에 나서봤자 나에게 절망감을 가져다주는 엔딩은 비슷했다. 이 경우엔 상대방에 대한 내 애정이 컸기 때문에 더 큰 우울감, 그리고 여기에 더한 두려움이 뒤따른다. '내 파트너가 이렇게 멍청하고 얄팍한 사람이었다니...절망...' 뭐 이런 감정이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꼈던 상황 몇 개를 복기해보자면 이렇다.

상황1.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나와 술을 마시며 '이게 왜 여성혐오 범죄냐. 남자가 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이냐. 기분 나쁘다. 억울하다'고 말했던 나의 Ex.

상황2. 후배가 동문회 MT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ㅂㄷㅂㄷ떨며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자, "속상한 거 아는데 그냥 무시해. 너만 손해야" "그냥 네가 참아. 그 학번 높은 (가해자) 선배가 MT에 따라왔을 정도면 동문회 내 입지도 너보다 넓을텐데" "그냥 좋게 넘어가" 따위의 말을 했던 썸남 A. (그의 발언은 분명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겠지만, 엄연히 2차 가해다)

상황3. 가부장제의 부당함에 대해 이해, 공감하면서도 "명절에 아내가 친정 먼저 가자고 하면 감당 안될 것 같다"고 말했던 첫사랑.

이런 상황들이 일어날 때 직감적으로 '이 사람과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없겠구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깨달음이 나를 두렵게해서 나는 애써 이를 외면하며 살아온 것 같다.

이러한 지난 삶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기에, 나에겐<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필요했다.

저자 이민경은 이 책이 페미니즘 이론서가 아닌 '실전용 매뉴얼'이라고 소개한다. 신박한 소개다. 내 구미를 확 끌어당겼다. 책을 펴들고 읽어내려갔을 때는 '어흑 ㅠㅠㅠㅠ 어헝헝 ㅠㅠㅠㅠㅠ 하............ㅠㅠㅠㅠ' 이런 감정이 들었다.  '왜 이렇게 예민해?' '일부만 겪는 일 갖고 오버하지 마' 등 책에 나오는 페미니즘 몰이해 집단이 하는 말들을 나도 현실 세계에서 수없이 들었고, 그때 느꼈던 고구마 1000개를 먹은 듯한 감정이 치밀러 올랐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나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한 사발의 사이다 같은 책이다. 나아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대화해야 할 지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다. 그러니까 정말 정말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스여졌다. 하지만 남자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또 권한다.

ps. 현재 '2016 알라딘 올해의 책' 투표<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올라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