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 키즈로 자랐다. 충실한 독자가 당연히 그래야하듯, J.K.롤링이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HARRY POTTER AND THE CURSED CHILD)>를 썼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나는 뜀박질 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1편부터 7편까지 영화를 다시 봤다. 여덟번째 해리포터 시리즈를 맞이하기 위한 일종의 준비운동이었다.

한글 번역본이 나오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빨리 읽고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서 영문판으로 읽었다.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는 소설 형식이 아니다. 연극 대본이다. 연극 대본을 통체로 읽기는 처음인데(호주에서 사온 <안네의 일기> 연극 버전이 있긴한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생각보다 술술 잘 읽혀 놀랐다. 롤링이 글을 잘 쓴 거일수도...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의 연기자들.


※ 스포주의 ※

<저주받은 아이>에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원년 주인공 크루인 해리 포터,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 그레인저, 드레이코 말포이 등은 다음 세대에게 주인공 내어줬다. 8권의 주인공은 지니 ♥ 해리 커플의 둘째 아들 알버스와 말포이의 아들 스콜피우스다. 둘은 절친한 사이인데 알버스는 아버지 해리와 사이가 안 좋고 스콜피우스는 볼드모트의 아들이라는 루머에 시달리는 설정으로 나온다. 볼드모트에게 자식이 있다고???!!! 라는 생각이 들면서 구미가 확 당기는 설정이다. 연극 대본을 읽다보면 볼드모트는 아들이 아니라 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설하고, <저주받은 아이>의 주제 의식은 (다른 해리포터 시리즈가 그렇듯) 가족의 사랑, 우정, 정의의 승리, 권선징악 같은 것들이다.  다 커버린 어른 머글로서 몇몇 대사는 심하게 오글거렸다. 사랑이나 우정, 가족애를 이야기하는 게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화가났다. '한가한 소리 하고 있네' 비스무리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이 각자도생의 공간이여서 그런가 보다. 


※ 헤르미온느가 백인이라고 누가 말했는데! 앙???! ※


노마 드메즈웨니. 출처: 연극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들' 공식 SNS


<저주받은 아이>에서 헤르미온느역을 연기할 배우 캐스팅을 두고 '인종' 논란이 불거졌다. 씁쓸한 한편 '헤르미온느가 백인이라고 누가 말했는데???' '헤르미온느는 흑인일 수도 있는데???'라는 의견이 제기됐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논란에 대해 원작자인 롤링이나 헤르미온느역을 오랫동안 연기했던 엠마 왓슨이 보인 반응 역시 성숙해서 보기 좋았다. 

흑인 헤르미온느 논란은 헤르미온느역에 아프리카계 흑인 배우 노마 드메즈웨니(Noma Dumezweni)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일부 네티즌이 비난하면서 시작됐다. 해리포터 원작에는 헤르미온느의 인종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당연히 백인일수도, 동양계일수도, 흑인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백인'을 인종의 디폴트로 설정해두고 달리 언급이 없다면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자 무지이다. 사실 나도 이 무지에서 떳떳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헤르미온느역에 흑인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언급이 없을 때는 당연히 백인'이라고 생각한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 것이 퍽 신났다. 그런데 몇몇 해리포터 팬들은 '흑인 헤르미온느'에 딴지를 걸었다. 

원작자인 J.K.롤링은 노마 드메즈웨니가 캐스팅된 것은 그의 연기가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헤르미온느를 백인으로 설정한 적이 없다면서 흑인 헤르미온느 캐스팅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일부 네티즌들을 일갈했다. (<가디언>의 관련 기사 보기)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헤르미온느 역을 연기한 엠마 왓슨도 노마 드메즈웨니의 캐스팅에 지지를 보냈다.


노마 드메즈웨니는 자신의 캐스팅을 둘러싼 불평들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비판적인 반응)은 무지하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그들은 창조적인 활동을 원하지 않는 거 같아요. 흑인 헤르미온느가 작가의 의도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건, 정말 상상력이 부족한 거예요.
우리가 물어봐야 하는 질문은 '그들이 정말 좋은 배우인가?' 이것 뿐이에요. 나는 지금까지 매우 위대한 흑인 배우와 백인 배우를 만났어요. 그리고 정말 형편없는 흑인 배우와 백인 배우도 만났죠.

이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연기자에게 '흑인 헤르미온느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일지 알 만하다. 

인간의 '디폴트'를 백인, 남성으로 설정하는 건 정말 똥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나 먼저 똥멍청이가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