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을 위한 변명》_장 폴 사르트르  


2014년 11월 10일 알라딘 신촌점에서 3,300원에 구입한 책이다. 오늘 《지식인의 죽음》을 다 읽었는데, '지식인' 관련 책을 읽는김에 읽자는 생각에 꺼내들었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총 165페이지의 얇은 이 책은 사르트르가 1965년 도쿄와 교토에서 한 세 차례의 강연을 텍스트로 옮겨놓은 것이다. cf) 전에 어떤 책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강연을 텍스트로 옮겨 출판한 책을 읽은 적 있다. 일본 학자였는데, 누구였더라... 제목은 뭐였더라...  

*첫째 날 강연 :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둘째 날 강연 : 지식인의 기능 
*셋째 날 강연: 작가는 지식인인가? 

 지금 40쪽에서 41쪽으로 넘어가는 부분을 읽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식인의 죽음》을 읽었을 때 '지식인'이라는 키워드로 어쩜 이렇게 다양하고도 우리 사회를 꿰뚫는 논평을 전개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으니 《지식인의 죽음》은 비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사유의 깊이나 힘이 다르다. 철학자의 위엄 over 저널리즘!!

  ■ 첫째 날 강연: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_ 를 읽고 든 생각 

1.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천'의 개념은, 까뮈가 《저항하는 인간》에서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2.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_intellectuel organique'라는 개념이 흥미롭다. 

유기적 지식인이란, 한 계급이 계급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배출한 자생적 지식인을 말한다. 즉 모든 계급은 계급 자신을 옹호하고 자신의 집단 의지를 확산시키는 나름대로의 지식인을 배출한다고 할 때, 계급이 계급 자신을 위해 배출하는 지식인, 또는 계급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이 지식인을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한다. 그람시는 이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신의 이익과 세계관을 대변할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 집단을 배출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3. 사르트르는 부르주아지의 유기적 지식인인을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 라고 표현한 것이 탁월하다. 

의사나 수학자, 법률가 등이 보편주의적인 자신의 실천적 지식과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특수주의적 실제 사이에서의 모순을 깨닫지만 만약 지배계급에 순응해버린다면 이들은 결코 지식인이 될 수 없다. 그 모순을 깨닫고 '자신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되면 이들은 단순 전문가에서 지식인이 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으로 취급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p50) ☞ 둘째 날 강연' 에서 사르트르는 '진정한 지식인'과 '사이비 지식인'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들은 모두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서 출발하지만,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데 스스로 한계를 갖을 경우 그 전문가는 '사이비 지식인' 이 되는 것. 이 얼마나 탁월한 통찰인가! 

 4. 가족 자본주의 (capitalisme familial) ↔ 경영 자본주의 이와 같이 실천은 현실을 드러내고, 현실을 극복하며, 현실을 보존하는, 그리고 현실의 미리 앞서서 변경하는 실천적인 지식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 둘째 날 강연: 지식인의 기능_을 읽고 

둘째 날 강연에서 하고 있는 말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식인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지식인 자신의 모순 속에서 사는 일이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급진주의를 통해 (즉 진리의 기술을 환상과 거짓에 적용함으로써) 지식인 자신의 모순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지식인은 이처럼 그 자신이 지닌 모순 자체를 통해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수 또는 학자는 지식인으로서 우선 탐구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특수주의가 보편적인 것에 가하는, 진리를 멈추게 하는 것으로 봉는 신화가 진리에 가하는 난폭한 제한 또는 교묘하기 짝이 없는 제한이 결국은 그를 조사자로 만들고 맙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남긴 영향인 모순적인 존재를 조화로운 전체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자기 자신만이 그의 유일한 조사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의 전문성 속에서 그가 사용하는 엄격한 방법은 자신을 만들어낸 사회에,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그 사회의 여러 구조, 특권, 실천에 적용할 때, 오로지 그때만 자신의 비밀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의 유기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반인종주의에 관한 보편적인 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또한 어린 시절과 연결된 깊은 심층 속에서는 인종주의자로 머물 수 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상생활 속에서 인종주의자로서 행동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가 아무리 인종주의의 비정상적인 측면을 폭로하는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극 자기 자신이라는 "이 유래 없는 괴물"에 대한 엄격한 조사를 통해서 그의 어린 시절부터 뿌리박힌 인종주의를 일소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결국 지식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5. 지식인의 가장 직접적인 적은 내가 사이비 지식인아라고 부르고자 하는 자, 니장이 집 지키는 개라고 명명했던 자, 즉 지배계급의 시주를 받아 자칭 엄격한 논증 - 마치 엄밀한 방법의 산물인것처럼 제시되는 논증 - 을 통해 특수주의 이데올로기르 옹호하려 드는 자입니다. 

사실 그에게는 진정한 지식인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근원적으로 보면 그 또한 진정한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시런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인 것입니다. 사이비 지식인이 무엇보다도 도넹 팔려서 그런 짓을 한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단순한 상상일 것입니다.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사이비 지식인으로 만드는 거래 행위는 보통 이상으로 신중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선 상부구조의 몇몇 하위 관리들은 그들의 이익이 지배계급의 이익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며 - 이것은 사실입니다 - 또 오로지 이 점만을 느끼고자 한다는 것 - 그들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은 아예 모른 척하는데 이것 또한 사실입니다 - 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인간의 소외에 대해서는 고려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소외되어 있거나 또는 앞으로 소외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71쪽 

다시 가서 읽을 것. 좋은 내용. 마음에 새겨야 할 내용.  

사이비 지식인과 진정한 지식인의 대화에서 개량주의적 논법과 그것의 실재적 결과(현상 유지)는 진정한 지식인을 필연적으로 혁명가가 되도록 이끌어갑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지식인은 개량주의란 결국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로 하여금 그의 고용주인 지배계급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지배계급에 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이중으로 유리한 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p84/ 그런데 우리가 프티부르주아에게서 보게 되는 특수화하는 이데올로기와 보편화하는 지식 사이의 모순이야말로 진정으로 지식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프티부르주아여야 하지만 또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특수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프티부르주아였던 적이 없었어야만 하는 그는 따라서 결코 지식인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날 강연 p84~85부분 에서, 프티부르주아 계급에 속해있으면서도 혜택 받지 못한 계급 즉, 프롤레탈리아 계급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급진주의적 혁명가가 되야 하는 '진정한 지식인'이 마주치는 모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책을 낸 조국 교수가 생각난다. 이 불신의 모순(프롤레탈리아가 지식인에 대해 갖는 모순) 때문에 지식인이 피착취계끕에 대하여 너무 지나친 겸손의 태도를 취하는 경우 ~ 심지어 책에서는 '대중정당에 들어가는 것' 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GO AND READ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