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엔 피로를 떨치기 좀처럼 쉽지 않다. 토요일엔 주중에 쌓인 피로에 짓눌려 몸이 납작해진다. 일요일에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어, 미뤄뒀던 약간의 사고를 한다.

지난 일요일과 이번 일요일(오늘)에 있었던 일들, 이어서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글로 남긴다. 

지난 주말. 어떤 대화 자리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분노와 실망감을 말하기에 열심을 떨었다. 어스토크라는 행사의 여러 발제자 중 여성이 단 한 명이었다는데 화가 났던 것이다. 




마이크를 남성이 독점하는 것에 대한 분노. 여성이 마이크를 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그것이 얼마나 기본 중에 기본인가에 대해 흥분하며 말했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던, 그리고 동의한다는 말도 잊지 않은 A가 말했다. 

'나에게 기본 중의 기본은 강간당하지 않는 것, 살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강간당하지 않고 여성살해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그런 위험에 노출돼 있는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편치 않다.' 

또 이런 말도 했다. 

'네가 말하기 전까진 발화의 기회를 남성이 독점하는 것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지점에 대해 그렇게까지 분노가 일지는 않는다. 분노 하는 네 모습을 보며 내가 응당 분노를 느껴야 할 일에 분노를 느끼지 않는건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함께 있던 B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행사장 안에서 여성이 남성만큼 마이크를 못 잡는 문제보다는) 장애 여성 등 여성 안에서 더 큰 차별에 놓인 사람들의 문제에 더 마음이 쓰인다.'

사실 이 말들을 듣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바로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남성들이 마이크를 독점하게 막아야 한다든가. 내가 여성의 발화권을 말한다고해서 여성 대상 범죄에 소홀한 것은 아니라든가, 강간당하지 않고 죽임당하지 않는 것은 너무 기본적인 것인데, 그 기본조차 위협받아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이 자칫 사치스럽게 느껴지는게 한탄스럽다든가. 따위의 말들

하지만 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미 너무 오래 떠들었기도 하거니와 대화를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말에서 소위 '주류 페미니스트적 편협함이나 납작함'을 느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미쳤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그저 나의 짐작이지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말을 꿀꺽 삼커버렸다.

사실 나는 스스로에게 '내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사소하게 다루지는 않나? 나의 여성주의가 편협하거나 납작한 점이 있진 않을까?' 라는 질문을 몇 번 던졌다. 우려와 두려움이 섞인 자문이다.

이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 내 안에서 다시 소환되자 나는 너무 빨리 피로해졌다. 주말을 야속하리만치 짧았고, 다시 월요일이 됐다. 

한 주를 또 바쁘게 살았다. 정신없이 살았다는 편이 더 맞겠다. 나의 집중력과 지력은 고작 한 줌. 이 한 줌을 온통 사무실에서 쏟고, 금요일엔 동료들과 회식을 하고, 토요일엔 전날 회식에서 한 말실수들을 자책하며 보냈다. 그리고 다시 오늘(=일요일)이 됐다. 


오늘은 날씨가 퍽 따뜻해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일요일이다. 평소 혼자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건 사치라고 여기지만, 오늘은 그 사치를 조금 부려 카페에 앉아 여러 텍스트들을 오갔다. 장 그르니에를 조금 읽었고 알베르 까뮈의 텍스트에도 잠간 들렸다. 수전 손택을 다룬 글도 꽤나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블로그에 올라온 글도 열댓편 연속으로 읽었다. 차차의 2019년 '성노동 프로젝트' 항목에 성판매자로 종사했거나 종사하는 여성들의 글들이 올라와 있다. 이 글들을 찾아 읽은 - 사실 pdf로 다운받아 아이패드에 넣고 밑줄 쳐가며 열심히 읽었음 - 이유는 복합적이다. 

지난주 일요일 마음 한 켠에 소용돌이를 일으킨 물음들 - 내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혹은 사소하게 다루지는 않았나. 타자화하지는 않았나. 나의 여성주의가 편협하거나 납작하지는 않을까 - 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고.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어떤 불편함과 정면으로 마주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프로젝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차차는 성판매자도 여느 노동자와 같이 노동자로서의 권리에서 배제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한 편 한 편 고유한 개인의 서사이면서도, 개인의 서사를 통해 사회의 문제를 다룬 이 글들을 읽다보니 - 몇 가지 눈에 들어오는 공통적인 포인트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편의를 위해 숫자를 달았지만, 별 뜻은 없다) 

1) '창녀'를 배제하고 혐오하며, 동시에 동정하고 시혜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넌덜머리

2) 성매매 종사 여성을 비자발적/자발적 종사자로 거칠게 나누려는 시도와 이 시도에 깔려 있는 모종의 의도. 즉, 비자발적 성판매 여성에겐 동정의 시선을 보내겠지만 어떤 잣대에 따라 충분히 비자발적이지 않은 - 자발적 종사자에게는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회에 대한 넌덜머리 

3) 다른 여느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창녀'들도 생존을 위해 성노동에 종사하고, 다른 여느 노동이 그러하듯 착취당하며 (성착취라는 이중 착취에 노출돼 있다), 이 착취 시스템에서 자신의 안전과 권리를 외치는 것이 왜 다른 노동자의 그것과 달리 여겨지는가에 대한 비판

4) 생존을 위해 성노동 종사를 고려해보지 않는 삶은 주류 계급만 누리는 혜택임에도 단지 그 주류에 들지 못해 생존을 위해 성노동을 해야하는 자신들을 비윤리적이라고 지탄하는 편협함

5) 성매매 종사 여성의 삶이 비참할 것이라고 여기는, 심지어 '비참해야 한다'는 폭력적인 접근



등등. 

성매매 종사를 '노동'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 비범죄화에 대한 담론 등 여러가지 이야기도 많았다. (Paid for 독서 노트 찾기)

불편함. 여러 글을 읽으며 든 감정. 

여러 글이 이야기하는 소위 '주류 페미니즘'이 '창녀'를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를 나도 갖고 있지는 않나 자문했다. 타자화하고 동정하고, 어쩌면 천시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나? 

내 주위에도 성매매에 종사했거나,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이 문제가 내 마음 속에서 정리되지 않고서는 이들을 잘 마주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처럼 실수를 할 것 같아서. 


솔직히 성매매 행위가 여성 전체의 인권을 하락시킨다는 - 그래서 전체 여성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생각, 때문에 성매매 종사 여성은 피해자인 동시에 어느정도 이기적으로 가해에 부역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한테 피해를 끼친다는 생각에 화가 난다. 이게 가감없이 쓴 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과 마음이 옳다거나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는 확신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성매매가 결코 내 인생의 선택지에 오른적이 없는 것은 나의 도덕적 단단함이나 강인함, 윤리적 고매함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뿐일 수 있으니까 - 

다시 예의 문제를 상기해버본다.

내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혹은 사소하게 다루지는 않았나. 타자화하지는 않았나. 나의 여성주의가 편협하거나 납작하지는 않은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나마 건진 작은 실마리는 예전에는 성매매 종사자가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게 당혹스러웠는데, 오늘 일련의 글을 읽고 더는 이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나의 힘듦을 계속 꺼내와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싶은 마음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점이다.


남은 질문들은 다음주 일요일에 이어나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