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이다. 

마음 속 가득 피어오르는 감정이 뭘까 생각하다가 환멸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무언가 역한 감정. 더없이 시시함. 이 감정들이 타인 그리고 나를 향해 들 때의 당혹감. 이 전반에 이름을 붙여주자면 그것은 환멸이었다. 모멸도 경멸도 아닌 환멸.

이날 오전, 나는 이 '환멸'이라는 단어 하나를 끄집어내면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어느새 늦은 오후였다. 쌓여있는 할일들로부터 도망치고싶어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 한 켠에 지금은 작고한 마광수 작가가 기증한 책들이 있다. 그 책들 사이를 걷다 우연히 토마스 만이 쓴 <토니오 크뢰거>를 빼들었다. 그리고 손 끝에 걸리는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펴들었다.

환멸 

우연히 펴든 그 '아무 페이지'에 적혀있던 단어. 토마스 만 단편을 엮은 책의 제2장에 실린 작품 제목이 바로 '환멸'이었던 것이다. 



토마스 만


오전 내내 생각한 '환멸'을 수만 권의 책들 중 우연히 잡힌 책, 그 책의 수많은 페이지들 중 우연히 펴든 페이지에서 활자로 만나니 신기했다. 가슴이 달떴다.

토마스 만은 환멸에 대해 대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것이 너무도 궁금해 나는 나를 조금씩 그리고 꾸준하고 서서히 죽이고 있는 쌓여 있는 미해결 일들을 미루고 '환멸'을 읽었다. 


환멸에 대하여 


토마스 만은 이렇게 묻는다. 

"짐작이 되십니까? 선생님은 '환멸'이 무엇인지를?" 

그러니까, 환멸은 무엇이고 이것을 어떻게 다루거나 받아들이거나, (필요하다면) 극복해야 한단 말인가. 

먼저 환멸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환멸 : (명사) 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

토마스 만이 말하는 환멸은 사전이 정의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힘써 노력했지만, 예상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실패나, 목적을 이루지 못한 낭패와 같은 그런 사소한 개개의 환멸이 아니라 넓고 일반적인 의미의 환멸 말입니다. 인생이 우리에게 마련하고 있는 전부인 그런 의미의 환멸 말입니다. ( ... ) 제겐 어렸을 때부터 그놈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단 말씀이에요. 그리고 그놈 덕택에 저는 고독하고 불행한 그리고 좀 괴상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인간으로부터 신과 같은 선량함과 동시에 몸서리쳐지는 악마적인 것을 기대했습니다. 또한 황홀한 아름다움. 동시에 추악함을 인생으로부터 기대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저의 가슴은 그러한 모든 것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동경이었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건 간에 체험에 대한 동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취할 듯이 희한한 행복에 대한 동경이었으며 동시에 생각도 못할 고뇌에 대한 동경이기도 했습니다. 

( ... ) 그 환멸이란 것이 결코 아름다운 희망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생긴 것이 아니고, 어떤 불행이 시작되었을 때 그걸 느꼈다는 점입니다.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나는 열성을 다하여 온갖 책들을 섭렵함으로써 인생에 대한 나의 웅장한 기대를 북돋우었던 것입니다. 시인들의 작품으로 말씀이죠. 그리고 저는 그 작가들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인이라는 작자들 말입니다. ( ... ) 잘났다고 날뛰는 시인 녀석들은 글쎄, 언어란 빈곤한 것, 오, 그것은 빈약한 것, 이렇게 노래 불러주었지요. 원 천만에요, 선생님! 언어는 인생의 빈곤, 그 국한됨에 비하면 풍부하기 한량없이 풍성한 것이라고만 생각되거든요.

저는 그 이름도 드높은 인생 속으로 나아갔습니다. 저의 어마어마한 예감이 들어맞을 수 있는 경험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열망을 듬뿍 안고서 말입니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것은 제 몫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지구상의 가장 이름난 곳들을 찾아가보았어요. 인간들이 위대한 말로써 칭송하고, 춤을 추며 야단을 치는 수많은 예술 작품 앞에 가서 서 있어 보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설 때면, 저는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 참 아름답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 그렇지만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까?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지금 너는 떨어지고 있다. 이제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어쨌단 말인가 - ?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고통이다! 지금 나는 그것을 당하고 있다 - 그래 그것이 도대체 어쨌단 말인가 -? 

행복도 저에게 환멸을 주었지요... 결국 내게 몇 번이고 환멸을 주게 한 것이 바로 전체적이며 보편적인 인생이고, 또한 평범하고 아무런 흥미도 없고 맥빠진 채 계속되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당신께 설명을 못하겠으니 말입니다. 

저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저는 죽음도 이미 자세히 알고 있지요, 이 인생의 최후의 환멸을 저는 잘 압니다. 이것이 죽음이다? 하고 최후의 순간에 저는 마음속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 - 그래 그게 도대체 어쨌단 말이냐?' 


요약하자면 환멸은 이른바 세상이, 그 세상에 내던져져 살아가는 인생이 기실 시시하다는 것을 눈치채버렸을 때 속절없이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과 인생은 기실 시시하고, 이 시시함은 행복이나 불행이나 아름다움이나 추함 등 어느 측면에서나 유효하다. 

이 빈곤하고 시시한 가운데 시인들이 써놓은 온갖 책들마저 없다면 그야말로 절망이 아닌가? 토마스 만과 나의 결정적 차이다. 토마스 만 (정확히 말하면, 토마스 만이 만든 소설 속 인물)은 인생의 빈곤함에 비해 풍부하기 한량 없이 풍성한 글들로 자신을 미혹한 시인들을 미워하지만, 나는 그 반대다. 그 미혹마저 없다면 세상은 더 시시한 곳이 되었을 테지.


'시니컬'한 태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짐짓 나는 정말 이 세상에 흥미를 느끼는 양, 몸을 한껏 앞으로 기울이곤했지만, 사실 그건 연기였다. 세상과 인생은 대개 시시하다. '고작 이게 다란 말인가?' 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 


적당히 환멸을 삼키며, 환멸을 맛보고 관찰하며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