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인터뷰 기사를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를 읽었을 때다. 그러니까 대략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인터뷰를 '섹스'에 비유했고 이 강렬한 단어만큼 내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인터뷰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다. 일종의 섹스이기도 하다. 상대를 완전히 발가벗기고 자신도 전인격을 투입하는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인터뷰 기사 몇 개를 썼다.

3월 20일 발행된 "인문학자의 눈으로 기계문명을 산책합니다", 5월 21일 발행된 "뇌공학 최대 화두는 뇌-인공지능 연결", 5월 25일 발행된 "목마른 공대생이 판 메이커 미디어, 긱블" 등 기사다.

나름 이런저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정말 '나름'의 공이였을 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먼저 인터뷰를 하며 내가 인터뷰 대상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는 않았는가 생각해봤다. 주도권을 따지는 게 우스울 수도 있지만,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넘겨주면 기사를 빙자한 광고밖에 될 수 없지 않은가. 주도권 면에서 많이 미흡했다는 생각이 든다. 질문을 통해 대상자가 하고자 하는 내용 이면까지 끌어낼 수 있는 인터뷰를 하고 싶다.

두 번째로 생각해본 부분은 인터뷰 이후 기사를 작성하는 단계에서다. 오리아나 팔라치는 하여간 필력이 끝내줬다. 그리고 그는 기사에 자신의 목소리를 끼워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전설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의 저자 산토 L. 아리코는 "팔라치가 기사에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끼워 넣는 성향은 독자들의 흥분을 끝까지 유지시키는 데서 가장 힘을 발휘한다"라고 했다.

기사에 내 목소리를 분명히 끼워 넣기.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나는 기사에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한다. 아직 내 목소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 필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아무쪼록 전설의 기자라는 오리아나 팔라치까지 들먹이며 인터뷰 기사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다음번 인터뷰 기사를 보다 잘 쓰고싶은 욕심에서다. 독자에게 정보를 전하기 급급하지 않고 나의 주관을 좀 더 드러내는 인터뷰 기사를 쓰고 싶다. 그게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건,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