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을 당했다. 가해자는 사촌오빠였고 나는 당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사건이 일어나고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비릿한 역겨움과 분노를 느낀다.

그 일을 기록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아서 글을 쓴다.

일이 일어난 건 2016년 10월 8일 외가쪽 사촌오빠 A의 결혼식에서였다.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서 기분이 좋았고 나는 A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또 다른 사촌오빠 B를 만나서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B는 결혼해 두 딸의 아빠였다. B는 인사하는 나를 위 아래로 훑었다. 나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불쾌했다. 하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어쩔 줄 몰랐기에 참았다.

잠시 후 우리는 모두 예식장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예식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B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의도적으로 수선을 떨며 '자 빨리빨리 올라가자~'라면서 달려와 내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빨리 올라가자 라는 대사를 뱉으며 다른 사람들을 앞질러 왔으면서 내 허리를 잡고는 나를 앞질러가지 않았다. 다만 'XX이 숙녀가 다 됐네'라고 말했다. 나는 불쾌했다. 방금 전 위아래로 나를 훑은 눈초리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숙녀가 다 됐네' 라고 말하는 건 빼박 성희롱이다.

하지만 또 나는 제대로 응수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제 나이가 몇인데요' 따위의 말을 했다. B는 '아직 고등학생인 줄 알았지' 따위의 말을 했다.

그때 '불쾌하다, 사과하라'고 말했어야 했다.

나는 식이 끝나고 점심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속이 메슥거웠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다. 엄마는 "그 놈이 어디매라고 눈을 아래위로 훑어"라면서도 "B가 원래 다정해서 스킨십을 많이해"라고 말했다. 또 "1년에 한 번 보는 사람인데 무시해버려"라고도 말했다.

B의 직업은 경찰이다. 내가 겪은 일을 미루어 짐작건데, 그는 밖에 나가서도 누군가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엄마가 말한 그 '원래 다정한 성격'을 방패삼아 성희롱을 남발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나는 문득 그의 아내와 두 딸이 불쌍해졌다. 특히 아내가.

분명한 건 이런 일을 겪으면 대처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정말 슬프게도 그렇다. '결혼식장 분위기를 망치는 건 아닐까' '친척 관계를 껄끄럽게 만드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올랐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어리석은 생각이란 걸 안다. 이성적으로는. 결혼식장 분위기를 망친 건 B였으며 친척 관계를 껄끄럽게 만든 것도 B이다. 그가 이 일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 일이 있을 후 여러번,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사과하라고 말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 침묵은 동의로 비쳐질 수 있으니까. 내가 이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지 않는다면 B는 이런 일들을 계속 할 테고,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 일을 기록해둬야겠다고 생각한다. 유사한 일이 발생했을 때 좀 더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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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사과를 받다-

이 성희롱 사건에 대한 역겨움은 시간이 지나도 가시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사과를 받지 못했고, 가해자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으니까.

22일 나는 B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B는 크게 당황하며 사과했다. 그는 '그럴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조심해달라고 당부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얼마 후 B에게 '전화 괜찮느냐'고 카톡이 왔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몰라 두려웠다. 어쨌든 다시 통화를 하게 됐고 B는 다시 한 번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얼굴을 보고 제대로 사과받는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