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11월 5일) 광화문 광장에 모인 시위 물결을 보며 <세상물정의 사회학>_노명우
의 '인정_인정받고 싶은 당신' 챕터가 떠올랐다. 이 챕터에는 사람들이 시위와 투쟁에 나서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평화에 관한 이상적인 질문을 현실적인 질문으로 바꾸면, 우리는 인간이 투쟁하는 이유를 묻게 된다.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평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투쟁에 나선 까닭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심성이 사나워서 투쟁할까? 투쟁이 공격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싸움꾼의 전유물이라는 사유의 습관에 젖어 있는 한, 우리가 떠올리는 투쟁의 사례는 길거리 취객들이 벌이고 있는 개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인간은 물질적 이익이 침해당했을 때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투쟁에 나선다고 싸움의 동기를 이해하는 한, 우리의 머릿속에는 부동산 가격이 떨어진다고 이른바 혐오시설 이전을 반대하는 피켓을 든 시위대의 모습만 떠오른다.

하지만 투쟁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싸움을 즐기는 싸움꾼이 아니다. 투쟁하는 사람은 보다 많은 여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돼지와 같은 존재도 아니고, 돈을 받고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왜 싸워야 하는지 이유조차 알려 하지 않는 '용역'도 아니다. 싸워야만 하는 유전자를 내재한 싸움꾼도 아닌 정신대 할머니들이, 부당해고 당한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철거민들이, 폭력과 고문에 항의하는 인권운동가들이, 등록금에 절망한 대학생들이 대체 왜 길거리에서 그리고 크레인 위에서 투쟁하는지 궁금할 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책이 악셀 호네트의 1992년 출간된 <인정투쟁>이다.


인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호네트는 인간을 규정하는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이 빚어내는 풍경을 탐색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얻고 그를 통해 자긍심을 획득하지만, 무시에 의해 자긍심이 훼손됐을 때는 투쟁하는 끊임없는 '인정투쟁'의 과정이다.

무시와 모욕을 통해 존엄이 훼손된 개인 혹은 집단의 명예 회복을 위한 행동인 인정투쟁의 원인은 탐욕도 트집도 투정도 아니다. 따라서 사회는 존엄을 되찾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이는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래야 사회는 정상적이라는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자기 존엄의 회복을 위해 인정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라야 비정상의 딱지를 떼어 버릴 수 있다.


11월 5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시위에서 시민들의 요구는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호네트가 말한 '인정투쟁'이 깔려있다.  우리 사회 대부분 사람들의 존엄이 '무시와 모욕을 통해 훼손'된 일은 어디에나 실재한다. '헬조선'에서 '노오오오오력' 해봤자 병신 면하기 쉽지 않다.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굉장히 읽고싶어지네 갑자기....울컥....) 아무튼 비참한 현실은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다시 한 번 명징하게 드러났다. 이에 대해 '더이상 존엄을 짓밟지 말라'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이 11월 5일 대규모 시위다.

이 인정투쟁의 끝에 시민의 존엄이 회복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더 살기 괜찮을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니까. 이어령 교수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땅의 인간 관계나 정치적 풍토를 생각하면 끈처럼 얽힌 사회 구조가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개조하기도 힘이 든다. 서로 얽혀 있기에 한 곳이 잘리어도 사회 전체가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말이다. 여기에 동의해 냉소적, 염세주의적으로 사회를 바라보고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어령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