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맨박스 발언_기록

몇 주 전 일이다. 우연히 우리집 현관 앞에서 아빠와 옆집 첫째 딸 A의 대화를 듣게됐다. 옆집 아이는 10대 초반으로 축구를 즐기는 아이다.

이날 A는 축구공을 들고 문밖을 나서다가 같은 시간 출근하던 우리 아빠를 만났다. A와 아빠는 곧 짧은 대화를 나눴다.

-아빠: 어디가니?
-A: 축구 연습하러 가요.
-아빠: 여자인데도 축구를 하는구나.

아주 짧은 대화다. 그런데 아빠는 축구는 남성적인 스포츠이며 여자 아이가 축구를 하는 것은 뭔가 어색한 구석이 있다는 '맨박스'적 발언을 했다. (맨박스는 여성과 차별되는 성향으로 '남성다움'을 구분 짓고 이를 문화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여성적인 성향'은 열등적이라는 전제가 깔린다. 따라서 맨박스가 남성에게 요구하는 성향을 여성이 보일 경우 사회가 직·간접적으로 던지는 '어색한' 시선과 여기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지적 역시 맨박스적 발언이라고 표현했다.)  

이 대화를 우연히 들은 나는 아빠에게 '그런 발언은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시키는 말이고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좋지 않다' 라고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그만뒀다. (내가 너무 까탈스럽게 군다고 잔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웠다)

아빠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것에 확신한다. (맨박스적으로 사고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이같이 악의가 전혀 없을 뿐더러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말이 옳지 않다는 데도 확신한다. 얼마전 읽은 토니 포터의 <맨박스>에서도 '선한 남자들이 알게 모르게 맨박스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잠시 <맨박스>의 구절을 살피자면,

우리는 아들들에게 터프하고 강해져야 하며 책임감 있는 남성이 돼야 한다고 가르친다. 동시에 그 정반대를 딸들에게 요구한다. 남과 싸우지 말아라, 말투를 곱게 써라,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라 등의 요구 사항이다. 

아무튼 A의 10대를 옆집 언니로서 응원한다.